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 엔 (문단 편집) === 해방 이후 ===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부터 미군이 주둔한 1945년 9월까지 일본 정부는 도쿄에서 급히 돈을 발행하여 공수하고, 닳아서 폐기해야 할 구권을 계속 보관하는 등의 작업으로 기존 발행량의 두배가 넘는 돈을 쌓아둔 뒤 패망이 확실시 될때부터 미군정이 들어올때까지 돈을 살포하여 일본인 귀향 자금,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재산 분배, 퇴직금, 재한 일본인 단체의 귀국 자금으로 썼고 [[초인플레이션|그 돈이 풀리자 한국 내의 물가가 넉 달 사이에 수십배로 폭등하였다.]] [[미군정]]이 시작되었지만,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 21호에 의해 조선은행법 효력이 존속되어 미군 군표와 함께 조선은행권이 계속 통용되었다. 이후 도안이 동일한 상태로 [[조선은행 원]]을 발행하게 된다. >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불법적 화폐 남발을 인정‧계승함으로써 위폐로 의심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는 위폐를 제조하여 유통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위폐처럼 보이는 진폐와 진폐처럼 보이는 위폐가 뒤섞여 화폐 유통 체계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물자 부족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선의 경제 상황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대중들의 불만은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 >임성욱, 미군정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 [[파일:통화발행고.png|width=100%]]||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의 통화발행고[br]세로 축: '''억''' 원 / 가로 축: 연도 및 월 ||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군 진주 이후에도 군표 대신 종전대로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광복 이후 불법적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진주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지폐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합법적인 것으로 사후 승인해 줌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인쇄한 불법 지폐를 유통시켰다.[[https://blog.naver.com/jeongpansa/222227137880|출처:임성욱]]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던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는 재정 적자를 조선은행권을 찍는 것으로 해결하라고 미군정 재무국장 찰스 고든 중령에게 권유했다. 이때부터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통화팽창이 주된 원인이 되어 물가는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https://blog.naver.com/jeongpansa/222227137880|출처:임성욱]] 조선총독부의 불법 화폐 남발과 미군정의 통화정책으로 1945년 9월 총 통화액은 130억 정도였다. 통화발행고 90억에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음성 자금 40~45억을 합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남발한 화폐는 위폐로 의심받을 정도로 품질이 나빠 경제에 혼란이 생겼다. 그러자 미군정은 고작 천만원 정도의 사건을 조작하여 불과 6명의 노동자와 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이 수백억원의 화폐를 찍으며 발생시킨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이것이 소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누명을 쓴 독립운동가는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 활동을 한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 [[이관술]]이었다. 또한 [[김철수(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을 함께한 [[박낙종]]과 [[송언필]], [[6.10 만세 운동]] 지도자인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1906)|권오직]]도 누명을 썼다. 독립운동가를 검거한 경찰들이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에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총괄자 임영태는 친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조작 사건의 시초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라고 분석한다. 정판사 사건으로 부활한 친일파는 4.3사건 및 6.25전쟁에서의 학살의 주범이 된다. || [[파일:노덕술최난수.jpg|width=100%]]|| ||정판사 사건 수사를 지휘한 친일경찰 노덕술(앞줄 왼쪽의 안경 쓴 사람)과 [[최난수]](앞줄 오른쪽의 양복 입은 사람)|| >정판사 ‘위폐’ 사건을 통해 조병옥-장택상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경찰 체제는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하게 되고 미군정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됨으로써 향후 반공 체제 형성의 중요한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된다. 또한 법적 한도를 넘어선 피의자에 대한 장기 구금 및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한 강압 수사 방식이라는 일제 경찰의 유산도 정판사 ‘위폐’ 사건을 거쳐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위폐 공판 소요 사건에서의 비무장 대중에게 총을 쏘는 과잉 진압 방식 역시도 미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116) 1946년 가을의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대한 과잉 진압 및 이후 제주 4·3 항쟁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미군정은 위폐 제조 범죄로 인해 민심이 불안해지고, 매점매석, 낭비 풍토가 조장되어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77) 이는 일제의 화폐 남발, 미군정의 일제 화폐 정책 승계, 각종 경제 실책 등으로 인한 물가 폭등 등 모든 경제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폐위조범, 즉 정판사 ‘위폐’ 사건 관계자 및 공산당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미군정 측이 이러한 공산당의 경제 교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5월 20일 미군정 당국은 백원짜리 신지폐, 즉 조선은행권 100원권 정(丁)권을 발행할 계획을 세웠으며,78) 7월 1일 신권을 발행하였다.(중략) 결국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 사건 발표를 통해 경제 혼란의 책임을 공산당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히 져야 책임과 감수해야 할 비난을 모면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